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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성령에 대한 신학(9)

 

만약 위에서 거론이 된 상황과 같은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면 끝내는 인간을 통해서 전해지는 설교까지도 우리는 들을 필요가 없게 된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개인의 마음에 직접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물로써 세례를 받는 일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세례가 아니라 그 보다 더 좋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빵과 포도주의 필요성까지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과 직접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교통을 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들과는 반대로 루터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오실 때 한정이 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로 오시고 겸허한 이 땅의 물세례를 통해서 성령께서 오시고, 떡과 포도주로 된 성찬예식과 인간의 말들을 통해서 전달이 되는 설교와 성경의 기록이 된 말씀들로 전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대 오늘날은 아마도 루터시대 보다 더 성령의 활동을 비범하고 황홀하고 그리고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새로운 오순절에 대한 글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거대한 부으심”에 대한 표현들이 있는 가하면, 이러한 표현들 중에는 황홀한 방언들과 기적들 중에서도 특히 치유에 대한 기적들이 더 많다.

 

십자가에 대한 신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성령의 임재와 그리고 그분의 비범한 활동을 거부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지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건들 자체가 이 시대가 그 어떤 다른 시대보다도 성령의 임재가 가장 강력하게 활동을 하시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 현상들로부터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이 더 많이 임재를 해서 활동을 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에 대한 십자가 신학에 대해서는 성경의 시초부터 발견이 되고 있는 일이다. 창세기 1장2절과 2장7절에서 이미 성령을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대행자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 말씀들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물질의 세계를 떠나서 활동을 하시지를 않고 창조의 세계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창조사역이 과거에 어느 한 때에 있었던 일들로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지나간 때에 있었던 일들로 생각을 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에 의존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편 104편의 말씀들은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계속해서 돌보신다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지금도 활발하게 지행이 되고 있는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 일은 마치 풀들이 자라서 모든 가축들과 생물들이 먹게 되고 그리고 그들이 잘 자라도록 보살피는 일들을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활동으로 인해서 인간들은 먹을거리들을 얻게 된다든가 또는 그들의 마음이 즐겁게 되는 포도주도 얻게 된다고 믿고 있다. 성령께서는 태초의 피조물들이 창조되는 일에 함께하셨던 것과 같이 지금의 창조의 사역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신다. 시편104편 30절에는 “주님(하나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성령님의 활동은 틀림없이 대단하고 그리고 비범한 사건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성령의 활동이 하나 밖에 없는 성령의 활동으로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계속적인 부으심의 활동이 없이는 만물의 계속적인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바울은 영과 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을 지어서 마치 영과 육체의 2원론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해석은 분명히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육체’ 혹은 ‘육’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을 뜻하는 말로 되어 있고 그리고 ‘영’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이 계시는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16절 이하에 기록이 된 말씀들을 읽어보면 육체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들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강조를 하려는 것은 육체가 하는 일들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을 대조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영과 육의 2분법적(dichotomy) 논리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육체가 하는 일들을 보면 부도덕한 행위들, 죄의 더러워진 행위들, 음탕한 행위들을 지적을 하고 있다. 이들 리스트를 보면 처음에는 마치 모든 것들이 육체에 관련이 된 것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그러한 모든 일들이 육체와 영의 2분법적으로 나눠지는 상황에서 그것들이 무두 영적인 죄에 속하는 것들로 보인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 마술, 증오, 투쟁, 질투, 분노, 이기심, 파벌조성, 질투의 태도들이 지적이 되고 있다.

 

바울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나누는 일은 거의 원하지 않는 것처럼 주로 육체적인 행위들- 술 취함, 흥청거림, 등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있다. 요컨대 어떤 일들이 육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영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실제로 육체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것인가 하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지적을 하는 대로는, 영적인 것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 또한 먹고 마시는 것들과 같은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서 25장31절 이하에 있는 말씀들과 같이 한 잔의 냉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것은 영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음식을 배고픈 자에게 주는 것도 예수님 자신을 대접하는 행동이 되며 이러한 행동 또한 영적인 행동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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