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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혁박사의 격려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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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공동체의 상태로 온전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해서 존재하는 공동체의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교우들은 공동체로 존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들 또한 공동체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원숙한 상태는 교회공동체의 온전한 상태로 되는 것을 뜻한다. 교회의 복음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중생이 된 상태를  말한다. 다음의 글은 한정된 지면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어떻게 활동을 하시는지에 대해서 고찰 하려고 한다.  복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어떠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지? 그리고 그 열매의 본질들은 무엇인지? 끝으로 성령의 활동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는 지에 대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서 고찰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데에는, 두 말할 나위없이, 성령님의 복음을 드높이는 그 활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일들에  대해서 고찰을 하게 된다.

 

1.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분이다.

 성령을 헬라어로 된 성경에는  “페뉴마”로 불렀는데 그 말은 “공기,” 혹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고전15:45에는 성령님을 “살려 주는 영”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성령을 살려주는 영으로 이해를 하고 나면 성령을 가리키는 헬라어의 공기라는 말의 의미를 더 가깝게 느끼게 된다. 성령님은 호흡을 하면서 존재하는 사람에게 공기처럼 언제나 함께 하도록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이처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과 결속이 되어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이미 알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더 새롭게 생각을 하도록 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는 하시지만, 그 성령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새롭게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님을 보내실 때에 그 분의 체류기간을 어느 정도로 한정을 하셨는지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곧 이해가 될 일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요14:16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는 약속의 말씀을 보게 된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성령님의 체류기간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또한 영원히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더 이해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혜사”라는 말씀에 대해서 고찰을 해야 한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 읽어지는 말인데 그 의미는 “상담자,” “위로자,” “대변자” 등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렇게 보혜사 성령님은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고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돌보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그런데 페뉴마로 표현이 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상황은 마치 한 순간도 공기의 호흡작용이 없이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중단이 될 상황으로 성령님의 임재는 우리에게는 화급한 일이 된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부재한 순간은 마치 연탄가스에 의해서 순간의 호흡이 차단이 되어서 일시에 페인이 되는 화급한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우리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영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상황은 마치 어떤 여행자가 자신의 화급한 상황으로 인해서 항공기의 빈 좌석을 줄기차게 기다리는 “대기자”의 상황과 같다고 하겠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마치 캄캄한 밤에 폭우가 내리는 바다의 풍랑을 만나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보내는 조난의 신호를 기다리는 구조대의 상황과 같다고 하겠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위급하고 그리고 시급한 일들의 상황을 도우시기 위해서 우리들 곁에 항시 대기하고 계시는 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 선생이 성령님을 “살려주는 영”으로 표현을 한 말씀은 성령님의 활동에 대해서 가장 적절하게 그리고 바르게 표현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2. 성령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아우르는 분이다.

창1:2에는 성령님을 창조주 하나님의 영으로 묘사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이 뜻하는 일들은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이 된다. 이렇게 해서 성령님은 인격적이고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아우르는 방식으로 존재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삼위일체 하나님 영으로 믿게 된다.

 

바울 선생은 또한 고후3:17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바울 선생은 성령의 형태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불렀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으로 계시는 곳과 때에는 우리들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들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때로는 성령의 임재의 현상을 어떤 뜨거운 열 현상이 우리들 몸에 일어난다거나 혹은 일종의 전류의 현상과 같은 것으로 성령의 활동을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만 단정을 해서 살아계시는 성령님의 인격적 특성을 약화시키고 그리고 성령님의 그 많고 그 다양한 활동의 현상들을 제한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들과 그리고 신학적인 개념으로는, 성령님은 한 개인으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영과,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아우러져서(perichoresis)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우리들 곁에서, 보혜사로서 우리들이 처한 위급하고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서 모든 것을 아시고 한 순간도 방관을 하는 일이 없이 돌보고 인도하는 일을 하는 분이시다. 예컨대 갈4:6의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는 말씀과 같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돌보는 일을 하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영이 되시는 성령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친숙하게 하는 영이 되시어서 그 어느 때나 그 어느 장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낯설거나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느낌과 생각을 몰아내는 일을 하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근원적인 평안과 평화의 내면에 깊이 잠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평화와 평안이야 말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실제로 느끼게 하는 가장 확실한 표시가 되기도 하다.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 입히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마6:30)과  세상을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죽는 자리에 내어주신 그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들이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이해하게 된다(요3:16). 또한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끝내는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으로 역사가 완성이 되면서 그 거대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한 일들이 모두 가능해 지게 된다는 것도 이해를 하게 된다 (요14:18). 성령의 활동들은 이 모든 좋은 일들, 진정으로 선한 일들이 우리들 인류와 그리고 나머지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풀어지게 된다는 믿음으로 성경은 성령을 “은혜의 원천”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히10:29).


3.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각인이 되어서 맺어진다

갈5:22-23에는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 열매들은 각각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들에 대한 덕목(德目)들로 되어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세우는 서양의 정서로 볼 때, 처음에 말해지는 사랑은 모든 덕목들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것이 되고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오는 절제의 덕목은 상대적으로 낮은 덕목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활동으로 맺어지는 열매들의 중요성을 순서적으로 본다면, 그 아홉가지 덕목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해서 구분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랜 동안 판단과 실천과 경험을 통해서 쌓아 온 개인의 생각, 습관과 판단을 제어 하는 일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의 덕목이 지향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는 점과, 그리고 절제의 덕목이 비록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해도 그 덕목의 실천의 범위는 주로 자신에게 한정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랑과 절제를 양극으로 하는 그 중간 권역에 있는 모든 덕목들이 적절하게 그 지형성 변동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들은 비록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 개인에게 맺어지는 일이지만 그 모든 열매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덕목들이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선두로 맺어야 성령의 열매들은 모두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특히 편견에 대한 판단이나 느낌들을 제어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비한 태도로 화평을 도모하여 화평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내에서 공동체의 발전과 유익을 위해서 회원들은 분담이 된 직무들을 선하고 충성되게 봉사를 해서, 화목하고 즐겁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목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는 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며 육성을 하는 데에 필요한 덕목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를 해야 한다.

 

바울 선생은 강조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한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넣어서 우리들의 마음과 정서가 활성화 되고 성장을 해서 우리들은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고 한다. 

 

고전13장 4절 이하에서 바울 선생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물론 이 모든 말씀들은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들이다. 그런대 바울 선생이 하는 모든 말씀들을 고찰을 하면 모두 사랑의 덕목이 중심이 되어서 나머지 여덟 가지의 성령의 열매들이 맺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울 선생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정신이 부재하다면 우리들이 받은 은사의 수행이 하나의 외형적인 일에 불과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그 큰일에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전14:3절 이하에서 바울 선생은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들의 그 실용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들로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된다. “…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라고 한다.  

 

바울 선생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은사들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귀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방언이 통역이 되어서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을 말하는 은사만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을 해 온 것과 같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그 자체에는 귀중한 선물이 된다. 그러나 개인이 받은 은사가 교회공동체 건설에 유익한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혹은 방언을 말하는 일이 오히려 자기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일에 활용을 하는 일이나 하게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 된다고 한다.

이제까지 한정적으로 고찰을 한 대로는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의 공동체라는 데에 그 특성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선 사랑의 공동체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 시대의 많은 교회공동체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기초한 공동체들로 구성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 선생은 많이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의 일부의 교회가 영성의 슬럼프로 접어들게 된다면 그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진 공동체로 다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다른 모든 일들은 바울 선생의 말대로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공동체 가운데 그리고 교우들의 마음에 부은바 되어서 사랑의 공동체로 활성화 되어야 할 것이다.


4. 영성은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혹은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그처럼 줄기차게 많은 활동을 하시는가에 대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고찰을 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이 성숙이 되는 일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즉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일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를 해야 할 것은 바울 선생이 고후5:17에서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교회라고 하는 말씀은 교회의 제도를 강조하는 말은 아니다. 그 보다는 바울 선생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예수 안에”라는 말씀들이 지적을 하는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복음의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들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하시는 성령의 활동의 복음적인 활동에 대해서 요한복음서에는 더욱 분명하게 말씀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관한 약속을 하시는 상황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회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그리하여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하시는 활동은 복음의 활동이 되는 것이다.

바울 선생은 또한 롬3:2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의롭다고 불리 움을 받게 되는 데에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전달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인들은 공동체의 생활을 통해서 거룩해 지고 성도로 불리 움을 받게 된다(고전1:2).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을 얻게 되는 데 그 이유는 그 공동체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1:30).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갈3:26).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양육하는 일을 하신다고 한다(엡1:3-4). 그러한 위대한 일들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 일어나게 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대속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엡1:7).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엡2:10).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빌4:7),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완전한 자로 세워 지게” 된다(골1:28).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생활을 통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일 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5:16-18).

 

이와 같이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더불어 주님의 은혜가 넘치며 풍성하게 얻게 되는 일들을 한다(딤전1:14). 또한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는 그 일을 잘 수행을 해서 믿음의 큰 담력을 얻게도 한다(딤전3:13).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된다(딤후3:15).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의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인들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하는 일들을 하신다(벧전5:10).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공동체 내에 머물게 되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요일5:20).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성령에 의해서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강화하는 보혜사 성령님은 자신의 많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사랑과 은혜의 모든 복음의 활동들이 하나로 아우러져서 조화와 협동으로 활동을 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들이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이러한 중생의 변화를 받는 데에는 그 오랜 동안 우리들 곁에 상주하면서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독려하시는 성령님의 그 은혜의 사역을 우리는 잠시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단계로 성장을 하는 데에는 우리들 개인의 어떤 외형적인 수련이나 혹은 고통이나, 혹은 어떤 감정의 변화나 물리적 현상의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의 그 성숙된 영성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에 의해서 깊게 부어지고 각인이 되고, 그리고 그 각인이 된 사랑이 기반이 되어서 성령님의 은혜의 보혜사님의 줄기차고 개인이 처한 상황에 필요한 복음의 활동으로 맺어진 열매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해서 성장을 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을 하신 우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접목이 되어서 역사의 완성의 때를 향해서 나아가는 공동체의 지체들로 그리스도의 통치와 보혜사 성령의 보호와 돌봄을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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