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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혁박사의 격려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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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과 인간의 영과의 관계

          (조지 S. 헨드리 지음. 황승룡 역. 기독교신학과 성령. 기독교문사. p. 149ff)                         - 요점정리 김종혁-


 

1). 우리에게는 오랜 동안 성령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 역할에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영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신약 성서에 의하면 인간이 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과 어떠한 관계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2). 고대 교회의 신학자들은 대개가 인간의 영의 에로스를 성령의 은사 속에서 실현이 되는 그 충만함에 대한 열망으로 생각을 하면서 이교도의 철학과 타협 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어거스틴(Augustine)이 그 대표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우리의 가슴은 당신 안에서 그 쉼을 찾을 때까지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3)). 이 말은 자기 초월에 대한 능력이 인간 속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수단으로 해서 만물을 넘어서 참되고 가장 선하며 유일한 하나님께 도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신학에서는 중세시절에 많이 개발된 인간론에서 열망이라는 개념으로 강조가 되었었다. 아퀴나스(Aquinas)는 피조물의 본질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의 행복과 삶의 목적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을 유한자가 갖고 있는 인간의 영의 열망으로 보았다.


4). 초기의 루터는 그의 “마리아 송가해설, 1521”에서 인간의 영에 대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영원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써 인간이 지닌 가장 고고하고(홀로 깨끗하고 뛰어난) 가장 심원하고 가장 고귀한 부분”이라고 했다.


5).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종교 개혁의 주안점과 연관시켜서 주장이 될 수 없다고 느껴지게 되었다. 은혜만으로 충분하다는 개혁가들의 생각은 인간 측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관계를 가질 필요를 남겨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전적무능력(total incapacity)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적 열망은 뒤틀리고 더럽혀졌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보면서 인간의 영은 아무런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한 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6). 하나님의 영의 하달(down reach)에 전적으로 의존을 하면서 인간의 영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이 상실되는(de-sprited) 상태로 되어 있다고 인식을 하게 되었다.


7). 칼빈은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있어서 선한 것을 향한 노력 혹은 열망마저도 천성적으로 행할 수 없다”고 한다(기독교강요, II, 4, 1).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의 만남에 있어서 인간의 열망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가 없어서, 이러한 만남에 있어서 인간의 영의 역할은 완전히 수동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성령에 의하여 활기를 얻고 새롭게 되어 지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로 인하여 이러한 결론에 도달이 되었다.


8). 개혁가들의 견해로는 은혜의 주권(sovereignty of grace)과 은혜의 충분성은 인간적인 노력이나 인간적인 열망에 대한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가페(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으로 열망과는 반대의 일)라는 주제의 상황이 너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서 에로스(소유에 대한 열망)는 모두 제거되어 버렸다. 개혁교회의 고전적인 신학의 틀은 대략 이러했다.


9).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주도권과 은혜의 충분성 등이 중심이 되어서 아가페 사랑의 독점성을 향해 나간다면 “인간의 역할은 완전히 수동적인 것이다”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기독교의 교회는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문제와 사상과 씨름을 해왔다.

5세기에 있었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Pelagius)간의 논쟁, 17세기 칼빈 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Arminians)파 간의 논란, 그리고 자연신학과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질문에 관한 현대신학의 논쟁들, 이 모두가 동일한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는 것들이었다.


10). 이 일에 대해서 바르트(K. Barth)는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것들을 다시 지지하면서  타협이 없는 논리로 생각을 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 즉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쟁취하신 구속(redemption)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는” 그 성령의 하달에 대한 것을 강조 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이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관계도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는 인간의 영의 상달(upward reach)의 길을 추구할 수가 없었다.


1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나 하나님과의 친교의 의미에서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12). 바르트는 인간이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인간을 향하여 나아온다는 것만 강조하고 다른 생각은 전혀 염두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성령)을 받는 자이지, 성령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행위에 대해서 인간 측에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3).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영적 움직임은 전적으로 일방적 방향의 것이었다. 바르트는 일반적인 계시와 인간의 영의 움직임의 관련이 되는 신앙적 접근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일은 종교가들이 주장을 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께로 향해 하나님에 의하여 그 분의 계시를 받게 된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14). 그리하여 바르트는 인간의 시도에 의해서 세워지는 상관의 신학(틸릭Tillich이 주창한 신학적 사상)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용납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바르트는 인류학을 기독론에다 흡수를 시키는 일을 했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과 존재를 위해서는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맥락을 벗어나는 신학적인 고찰은 그 어떤 것도 바르트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15).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이라는 개혁자들의 주제를 더 깊게 이해를 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논증의 전제를 형성하는 은혜의 개념 속에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개혁자들은 은혜에 대한 개념의 중요성은 어거스틴에게서 배웠다. 그것이 중세 로마 가톨릭사상의 것보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월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은혜의 개념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를 했기 때문이다.


16). 그러면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에 대한 사상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의 전체로 이해를 한다. 물론 신약에서는 진리(요1:17), 믿음(갈3:25), 사랑(롬8:39), 생명(요일1:2) 등의 표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다. 복음서들 안에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지는 것들은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있다(고후8:9).


17). 그런데 은혜라는 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을 요약을, 은혜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생각을 했다. 이렇게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과정과 연결을 지어서 생각을 하고 나면,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심의 일이 중요하게 떠오른다. 즉 높고 거룩한 곳(사57:15)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시는 그리고 아무도 본 적이 없었던 하나님(요1:18)께서 자기를 낮추어서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인간과의 관계를 세우신 일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18).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 하나님의 독생자가 …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강조 한다”(니케아 신조에서). “그리스도 예수… 그는 근본 하나님의 형체시지만”, “자기를 비워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빌2:5-8). 그리하여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이 세상 속에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이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이다(요1:1-14).


19). 그런데, 성육신 하신 주님은 인자(人子)로서 오셨고, 그 예수께서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일 또한 그 분의 사명이요 운명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 앞에서 허리를 굽히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참다운 관계,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세우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자유가 보증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나” 라는  관계로 축소가 될 것이다.


20). 그리하여 성육신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비인격적으로 다루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형체를 취하사 스스로를 인간의 상황에 적응을 하시는 일이다. 그 일은 인간을 하나의 자유로운 주체로 대하시고 인간을 하나님 자신과의 인격적인 관계에로 대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인격적인 관계는 인간을 “당신”(thou)으로서 대하시는 것이 되며, 하나의 주체로서 존중을 하면서 그를 접근을 해서, 그 개인을 완성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1).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의 수준까지 낮추셨다는 것을 의미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시고 그들을 인간으로 존중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 오실 때에 인간의 기를 꺾지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심으로써 자신의 인간됨을 증언하신 것이어서 이는 오히려 기독론(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을 인간학에 복종시키신 것이기도 하다.


22). 복음의 권위는 바로 이러한 점들이 강조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사역에서 은혜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때에는 그 일이 오로지 하나님 쪽에서 수직적으로 하신 일만을 의미하는 은혜의 측면으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혜의 일에는 수평적인 측면으로 표시되는 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개념에서 이러한 수평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하나의 실수로 생각을 해야 한다.


23). 인간의 측면을 지나칠 정도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은혜에 관한 확신을  복음주의적이지 못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진정한 복음주의에 대한 확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개념에 그 기초를 둘 때에 가능해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육신 하신 말씀의 은혜를 의미한다. 성육신 하신 말씀은 위로부터 인간위에 내려올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수준에서 인간을 만나려고 오시는 그분의 호의에 우리가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인간의 영을 통해서 진행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24). 인간의 영의 본성과 그 활동이 제대로 이해되어진다면, 인간 속에 피조 된 영의 존재가 은혜의 독점적인 충분성과 상충이 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언제나 성령과 인간의 영이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을 인간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어떤 관계의 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 사상 속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


25). 죄인 된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능한 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의하여 소외가 되어 있다 해도, 인간은 피조 된 영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은 인간의 고유한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인 된 인간의 내면의 영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상실된 관계의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자유 안에 있는 관계이고 인간의 영은 자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26). 창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갖도록 정해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이므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피조 된 영이라는 형태로 자유를 부여받았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의 피조물적인 구조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어떤 친근성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자유로이 인도 되고(willed) 또한 인간의 자유에 의하여 자유로이 받아들여지는 일종의 영의 관계로 이해  되어져야 한다.


27). 그리하여 만약 이러한 관계가 창조 된 영과 창조 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Spirit)과의 자유로운 교신이 실현되어진다면 그들 사이의 친교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치환이 되어지지 않으면서도 성령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민감하게 되면서 성령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다. 신약 속에서 “성령의 교제”라는 개념으로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영은 그 독특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마치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롬8:16)라는 말씀과 같이.

28). 인간의 영 자체의 독특성은 자체에 대해서 거의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과의 교제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게”하신다고 한다(행9:17).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실현이 된 관계는 이분법적(하나님의 영과 인간) 언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언어는 하나님과 교제 속에 있지 않으며 죄인 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기에도 적당하지 않다.


29).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파괴된 인간 속에서 관계가 일어나야 한다. 헨드리 교수는 인간의 타락 된 상황을 삼분법(하나님의 영, 인간의 영 그리고 인간)으로 표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 피조물로서 의존을 하는 일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화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은 피조 된 영으로서 그의 자유 안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에게 반응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0). 이렇게 영으로 남아 있는 영적 활동의 특성은 죄인 된 인간 속에서 계속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그 인간의 영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을 상실해버리고 불확실한 자기 초월을 위한 능력으로 전향이 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베르댜에프(Berdyaev)는 인간의 곤경의 원인은 “인간은 자신의 원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헨드리는 지금의 그는 그 잃어버린 원형에 대한 형상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 속의 영은 그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지닌 형상의 특성을 가리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31). 인간이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로 변화시킨 일은 바로 인간의 영의 자유 안에 의해서이다. 성령은 우리 인간의 영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들과 더불어 증거를 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영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 잘못된 인간의 영의 자유를 즉 하나님으로부터자유를 하나님께로 향한 참된 자유로 되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참된 자유로 회복시키는 일을 하신다. 그렇게 된 때에 인간의 영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변화가 될 것이다.  

 

<관련 미가608 메시지>
성령님이 여시는 제3의 천년기
인생의 참 성공은 "만남"에 있다

 

<... ‘나와 너’가 ‘나와 너’란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 너와 나 너와 나 사이가 주님과 나 사이가 너와 나, 아내와 남편 사이와 자식과 아버지 사이와 자식과 엄마의 사이가 너와 나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느 사이에든지 간에 가까운 것을 말하고 있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항상 너와 나의 사이가 주님과 나와의 사이가 너무 멀다고 느껴지기에 이렇게 고통 속에서 있는 것을 알라. 우리 주님은 너와 나 사이가 가깝고 먼 것은 마음 생각 또 내 것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온전히 믿지 못하매 너와 나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알라. ...> (20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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