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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칼럼
이사야 칼럼 은혜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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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은 전쟁터에 이르기 전 전략과 지략에서 판가름난다.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다시 재침의 기회를 노리며 승리할 계책을 마련하였다. 이순신 제거에 성공하자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유린하고 닥치는대로 조선인을 살륙하고 코를 베어갔다.

6.25전쟁이후 북한은 계속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다만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독재자의 숙제였으나 오늘의 노무현정권이 잘 해결해 주고 있다. 임진 정유재란에서 일본의 승리를 도와준 인물이 선조 김응서 윤두서 원균 등 서인이었다면 오늘날 노무현 송민순 윤광웅 등 열린당이 북한을 도와 미군을 철수시키고 재침을 성공시키는 앞잡이들이라 할 것이다.

<가관도 아니 한국정부가 모든 것을 다 다 한미동맹관계를 다 깨뜨리고 북한(北韓)과의 관계를 세우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있구나....> (2005.7.20) 

무서움을 모르는 대통령과 국방장관
한국과 미국이 동맹관계를 맺은 것은 54년부터다. 한미동맹도 이제 불혹(不惑)을 지나 하늘의 뜻인 천명(天命)을 헤아릴 만한 연륜이 쌓인 것이다. 한국은 이 토대 위에서 그 세월 나라를 보존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올라서 지금 자주(自主)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주를 들먹이는 횟수가 잦은 사람일수록 한미동맹의 역사에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많다.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45년 8월 15일부터 한국과 미국이 동맹관계였던 걸로 알고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나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가물가물할 때 마주친 것이 미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미군을 동맹군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미군은 동맹의 의무를 지키려고 뛰어온 동맹군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두 세력권으로 가른 동서 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달려온 군대였다.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이 동맹 없는 나라의 고단함을 절절하게 느꼈던 것은 6·25를 거치면서다. 8·15 해방 무렵의 남쪽은 방직공장 몇 개에다 신발공장과 정미소가 산업시설의 전부였다. 발전소도 비료공장도 광산도 모두 38선 이북에 몰려 있었다. 남북의 국력은 비교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북은 공산주의 종주국(宗主國)인 소련, 7억 인구의 중공과 뭍으로 이어져 있다. UN 깃발을 앞세운 미군 주력(主力)의 연합군에 의해 6·25의 포화(砲火)는 잠시 멎었다지만, 언제 북이 다시 밀고 내려올지 모를 형편이었다. 그 상황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북한의 재침략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동맹으로 미국의 발을 이 땅에 묶어 놓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금(古今)의 역사에 작은 나라를 위해서 큰 전쟁에 뛰어들려는 나라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6·25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한국에 미군 투입 결정을 내린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갔다. 언론은 ‘한국전쟁’이라는 말 대신 ‘트루먼의 전쟁’이라는 말로 트루먼을 비꼴 정도였다. 하긴 제 나라 아들들이 생판 모르는 남의 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기를 바라는 국민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제2차 대전 유럽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수많은 참호 속의 주검과 마주쳤던 기억을 아직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대통령과 전쟁에 나간 적이 없는 장군이나 전쟁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법이다. 아이젠하워는 몸을 사렸다. 대통령 이승만이 한미동맹을 추진하면서 미국 주재 한국대사에게 보냈던 수백 통의 전보(電報)와 주한 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나눴던 수십 건의 대화 기록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던 대한민국의 절박함을 증언해주고 있다. 미국 인사들이, 미국을 어르고 달래며 방위조약 체결을 밀어붙이던 이승만에게 ‘사기꾼’이라는 모욕적 표현을 붙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이런 수모를 견뎌내고 움켜쥔 것이 전문(前文)과 6개 조항으로 된 ‘대한민국과 미(美)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 200자 원고지 7~8장 분량의 짤막한 조약이다. 6·25 전쟁에서 흘린 수백만명의 한국인의 피가 밴 문서다. 이로써 한국과 미국은 비로소 동맹으로 맺어졌고 전쟁의 거친 숨소리도 함께 잦아들었다. 무엇보다도 전쟁 예방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어디에도 외부의 무력 공격이 있을 경우 동맹국의 군대를 자동적으로 투입한다는 구절은 없다. ‘양국 헌법상의 절차를 밟아 행동할 것’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가능하도록 한 것이 전쟁이 일어나면 한미연합사령부 체제 안에서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도록 한 합의다. 이 합의에 따라 적의 공격은 한국과 미국에 대한 공동 공격으로 간주돼 3000대의 최신 항공기, 5개의 항공모함 전단, 66만명의 미군 증원군이 한꺼번에 한반도에 밀려들게 돼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의 재발을 막아온 결정적 브레이크는 바로 이것이다. 북한이 기를 쓰고 이 문제에 덤벼드는 속셈은 알 만한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방장관이 자주(自主)의 깃발을 앞세우고 북한보다 더한 집념으로 이 성벽(城壁)을 허물려고 하는 이유다. 전쟁을 모르는 대통령과 전쟁에 나간 적이 없는 장군 출신의 국방장관이어서일까. 아니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사람 속은 모른다던 옛말 그대로인가.
-강천석 주필, 조선일보 2006.08.18 

[사설] 억지와 고집이 국익에 무슨 도움 되나
청와대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의 한국군 단독 행사와 관련해 제기되는 비판에 반박하고 나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는 노태우 정부 때 결정된 뒤 문민정부에서 일부 이행되다가 중단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정부 들어 시작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송민순 외교안보정책실장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은 유사 시 나토에 파견되는 자국 전력의 10%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회원국이 지휘 통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반박은 "두루뭉술한 용어"의 구사나 "핵심 내용의 삭제" 등을 통해 진상과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다.
-전작권 환수 땐 수백조원대 비용 부담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대 초반 평시.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 단독 행사가 한.미 간에 논의된 것은 사실이다. 냉전 종식에 따라 2000년대엔 북한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그 결과 평시작전통제권부터 한국군이 단독 행사키로 92년 합의됐다. 문제는 전시작전통제권이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쳤느냐다. 당시 군내 일각에서 몇 가지 환수 시점을 상정하고 논의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마저 93년 북한 핵 문제가 터지자 중단됐다. 이즈음 추진됐던 주한미군 3단계 감축계획 중 2단계가 중단된 것이 바로 이런 사정을 말해 준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 때 끝났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식이다. 문민정부에서 이행된 것은 평시작전통제권에 국한됐음에도 이를 "작전통제권"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린 것이다. 마치 전작권도 포함된 것처럼 말이다. 송 실장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그의 주장에는 공격을 받은 나토 회원국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가 빠졌다. 전쟁의 1차적 당사자가 된 그 국가의 전작권은 나토 사령관에게 있다는 점은 외면하고, 나머지 국가의 경우만 거론한 것이다. 이 정권이 "전작권 환수"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것도 타당성이 없다. 특히 이를 통해 "미국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전작권을 갖고 간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억지다. "전작권"은 원래 한국전 이후 우리가 원해서 미국에 준 것이다. 현재의 전작권도 한.미 대통령의 공동 지휘를 받아 한미연합사령관이 행사하게 돼 있어 "공동 행사"가 적확한 표현이다. 이렇게 사안이 명백함에도 이 정권은 엉뚱한 논리만 고집하고, 현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전작권 단독 행사에 따른 수백조원대의 비용 부담으로 겪게 될 국민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한국군 전력을 보다 강화한 뒤 논의해도 될 것을 왜 "몇 년 후"라는 가정에 입각해 추진하느냐"는 국민의 우려도 오불관언이다. 오로지 이념적 코드인 "자주"를 한껏 고양시키는 것을 이 정권의 "업적"으로 삼겠다는 기세인 것이다.
-미군 철수로 국력 추락한 필리핀
이런 점에서 방한한 헨리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한국의 몇몇 정치가는) 곤란한 처지가 되고 나서야 우리한테 돈과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또 미군을 철수해 국력이 추락한 필리핀 사례를 들면서 "한국도 마찬가지의 경우라고 믿고 싶다"고 밝혔다. 한.미동맹의 와해상을 정말 실감나게 전한 것이다. 이런 마당에 전작권 문제는 예정대로 한.미 간에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전작권을 이양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현될 경우 노 대통령은 나라의 안보를 정말 책임질 수 있는가. 정부는 더 이상 설득력 없는 논리에만 매달리지 말고 나라의 현실을 놓고 진정으로 고민해야 한다. 특히 하이드 의원의 말을 유념해야 한다.
-중앙일보 06-08-12

옥에 갇힌 이순신, 그리고 칠전량 패배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전쟁이 시작했지만, 막상 주전론을 펼친 고니시로써는 근심만 더해갔다. 히데요시를 속여가면서까지 심유경과 강화조약을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종결시켜 더이상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을 한다고 한다면, 임진전쟁과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군의 걸림돌인 이순신 함대를 없애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이순신은 한산도 전투 이후 여수에서 한산도로 본영을 옮긴뒤, 얼마 안있어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름이야 충청,전라,경상의 수군을 통괄하는 것이지만,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사실상 이순신 본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이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켜, 통제영의 분위기를 흐려놓고 있었다. 자기 본영의 군사들이 이순신 본영의 군사들보다도 상이 적니 계급이 적니 하며 온갖 불만을 쏟아놓았고, 비록 계급은 자기가 위이지만, 그래도 연배인데다가 자기보다 먼저 관직에 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온순한 말로 설득할려고 했으나,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원균은 임진왜란초부터 경상 우수영이 소유하고 있던 70여 척의 배를 날려먹고, 고작 5척밖에 안되는 배로 전라좌수영에 합류한 후, 이순신 본대가 열심히 전투를 치르고 있는동안, 뒤에서 죽은 적군들의 목을 베어 그것이 공인양 조정에 보고해 자신을 옹호하는 서인들을 통해 원균이 장비와 같은 용맹을 가졌느니 명장이니 이런 소리를 선조에게 아뢰니, 선조가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로 인해 수군이 분열양상이 되자, 조정으로써도 더이상 원균을 감싸줄 수 없었기 때문에 원균을 충청병사로 보냄으로써 수군분열이 진정되어갔다. 하지만 원균이 다시 경상우수사로 재부임하게 되었고, 서인과 결탁해 이순신을 밀어내고 자신이 통제사가 될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고니시가 요시라라는 첩자를 보냈는데, 경상우병사인 김응서와 친분이 있었던 요시라는 가토가 부산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이순신으로 하여금 미리 매복하여 그를 죽이도록 하라고 했다. 당시 일본군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고니시와 가토의 앙숙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올커니하고 계책에 말려들었고, 이순신에게 출격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요시라의 반간계를 눈치챈 이순신은 출격을 하지 않았고, 답답해진 선조는 도원수 권율을 통해 출격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되자, 첩자인 요시라는 "키요마사가 부산 앞바다에서 7일간 머물러 있었는데, 왜 잡지 않았느냐."라며 조정을 충동질한다. 그때 원균은 상소를 올려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진에 출격해 적을 섬멸하겠다며 호언장담하며 나서기 시작했다. 요시라의 충동질과 원균의 호언장담에 기가 살은 선조는 "한산도의 장수는 편하게 누워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며 질책했고, 거기에 입을 맞춘 간신들은 "임진년에 이순신이 공을 세운 건 정운이 무서워서 출격한 것"이라며 "원균과 정운이 없었다면 출격도 못했을 것"이라며 선조의 비위를 맞춘다. 선조는 마침내 이순신을 의금부에 하옥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그와 동시에 호언장담한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할 것을 지시한다. 이순신은 체포되면서 한산도 통제영을 인계했는데, 통제영이 비축되어 있는 군량미는 1만 석에 가까웠고, 화약과 총통도 판옥선 80척이 무장할 수 있을 만큼 수량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순신의 능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월 12일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에게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당시 친구였던 유성룡은 정승이었음에도 구원해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순신을 이지경에 몰아넣은 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을때, 평양 근처에서 고니시와 담판을 지은 적이 있었다. 그때 유성룡이 강화하자는 말을 꺼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가 전쟁이 소강기에 접어들면서 젊은 간관들을 중심으로 유성룡이 그릇된 길로 나라를 이끌었다며 탄핵할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이순신을 공격한 것이었다. 유성룡이 이순신의 구명에 나설 경우, 간관들은 유성룡과 이순신을 한데 묶어 공격할 것이 뻔하고, 둘다 죽이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유성룡으로써도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지중추부사 정탁의 구명소로 인해 겨우 이순신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세번째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한편 선조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에게 재차 구원을 청했고, 명나라 조정은 짐짓 조선 조정을 꾸짖으며, 양원을 비롯한 명나라 8만 정도가 조선에 들어와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했지만, 호언장담과 달리 부산에 출격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선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출격을 나가긴 했는데, 조선 관군의 허가를 받고 나무를 베고 있던 왜군들을 공격해 적선 3척을 불태우고, 수급 47개를 얻었지만, 결국 들통내 원균에게 내려지던 상이 취소가 되었다. 원균은 그뒤 차일피일 부산진에 출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답답해진 선조가 이원익을 보내 통제영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지시했고, 이원익은 통제영의 상태를 보고, 하도 한심스러워 원균을 데리고 안골포로 나갔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없이 오히려 우리측 피해만 속출하자, 다시 회군했고, 이원익은 순천부 도체찰사에 돌아가더니 권율을 보고 원균이 출전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권율을 명을 받은뒤,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쳐 때렸다. 부아가 난 원균은 3도 수군 143척을 모두 총동원해 부산진 출격을 지시했다. 하지만 홧김에 하는 전투는 애시당초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작전계획은 전혀 짜지 않고, 군사의 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원균은 전투를 강요했고, 군사들의 사기는 오르지 않았다. 거기에 판옥선 1척당 164명이 되던 승무원 수가 90명으로 줄어들면서 노 젓는 격군 역시 반으로 줄어 제대로 교대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노를 저어 지친 상태였다. 반면 적군은 이미 우리가 부산진으로 향할 줄을 알고, 원균의 함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나마 일본군이 그동안 조선 수군에게 당한 것이 치가 떨렸는지, 섣불리 덤비지 못해서 그나마 덜 피해입은 것이지, 겨우 7월 11일 칠전량 외줄포로 귀환했다. 그러자 권율은 다시 때려 부산 재출격을 지시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원균은 다시 출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원균옹호론자들은 원균의 패배가 권율의 독촉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권율은 어디까지나 조정의 명을 수행하는 장수에 불과했고, 부산진 전투는 그가 강요하는 전투가 아니었다. 더구나 원균이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진의 왜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처럼 큰 소리쳤다. 애시당초 칠전량 패배는 원균이 자초한 일이지, 권율이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운명의 7월 16일이 다가왔다. 일본함대는 소수 규모로 기습해 조선 대선단을 괴롭힌 뒤 후퇴를 거듭하면서 조선 수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은 그의 휘하 전함 12척을 거느리고 현장을 이탈했다. 그 12척이야말로 칠전량 전투 패배 이후 무너진 조선수군을 맡은 이순신 기적과 같은 대승을 거두고, 조선수군을 재건하게 된다. 16일 새벽 마침내 일본 수군은 1000여척에 달하는 함대를 이끌고, 조선 수군을 3,4겹으로 에워싼 뒤, 공격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등이 침착하게 주력전함들을 지휘하며 포위망을 뚫으며 견내량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지친 수군들은 제대로 싸울 수 없었고, 화포마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일본군에 의해 함몰되어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원균은 육지에서 내려 배를 대고 도망쳤다. 육중한 몸뚱아리로 살고자 하는 마음에 육지에 내렸지만, 그것에는 이미 왜군이 매복해 있었다.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채 원균은 단 일합에 일본군의 칼에 죽었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등은 전쟁의 책임을 통감한채, 바다에 빠져 죽음으로써 조선 수군의 운명과 같이 했다. 이억기, 그는 조선 왕실의 후손이면서, 전라우수사였다. 한때 이순신과 똑같은 동렬이었으나, 이순신의 인덕과 능력에 감동하여, 그를 진심으로 따랐고, 이순신도 그를 아껴 차후 통제사감으로 인정받던 그였다. 새로 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의 조선 수군 아래서 끝까지 조선 수군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그였지만, 끝내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원균, 요즘 원균옹호론자가 많이 늘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명장이 아니었다.오죽하면 그의 친척마저 그의 능력을 의심했을까? 그의 친척(안방전)이 쓴 <은봉전서>라는 책이 있다. 원균은 나의 중부인 동암공(안중흥으로써 동암처사라고 불렸다. 나중에 효행으로 헌릉참봉으로 제수되었다.)의 처 원씨의 친족이었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할때,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기를 "나는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 하였다. 중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영공께서 적을 격파하는데 마음을 다하여 공업이 이순신보다 두드러질 수 있다면, 이순신에게 치욕을 씻을 수 있다 하겠지만, 고작 이순신을 갈아치운 것으로 통쾌하다면 어찌 치욕을 씻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자 원균이 대답하기를 "나는 적을 만나면 싸울때 거리가 멀면 편전을 쓰며, 거리가 가까우면 장전을 쓰고, 육박전일때는 칼을 쓰고, 칼이 부러지면 곤봉으로 싸울 것이니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 그러자 중부께서 이르기를 "대장이 되어 고작 칼이나 곤봉을 써야 되겠습니까?"하였다. 중부께서 원균이 돌아간뒤 말하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하기를 틀렸다. 기겁이나 조괄도 저 자보다 나으리라."하고 오랫동안 탄식을 하셨다. 남쪽 지방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원균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고작 활과 칼로 싸우는 것만 알지, 화포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희한한 일일 것이다. 도대체 이순신을 따라다니면서 임진전쟁을 겪은 것은 도대체 뭐에다 써먹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원균옹호론자들이 말하는 명장 원균의 능력이 묻고 싶다.
-http://blog.naver.com/pjk1981/80027438412

<관련 미가608 메시지>
http://www.micah608.com/6-2-22-conspiracy-unification.htm
http://www.micah608.com/5-10-15-foolish-bastar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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