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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칼럼
이사야 칼럼 은혜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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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민들이 지지하며 원한다고 좋은 지도자가 된다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중이 원하는대로 비위를 맞추는 포퓰리즘 지도자가 있는가하면 윈스턴 처칠과 같은 위기시대의 예언자적 지도자도 있다. 세상에 전혀 일리가 없는 주장을 하는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견해차이가 있을 뿐 그들의 주장에는 옳아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이것이 옳아보이고 저것도 옳아보이는 혼란을 겪게 된다. 보통의 경우에는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포퓰리즘 지도자를 선호하며 예언자적 지도자는 속성상 달콤한 미래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배척을 당한다. 처칠의 경우에도 많은 시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국민들은 처칠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에도 "전쟁"을 말하는 지도자보다 "평화"를 말하는 지도자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영국이나 한국이나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가장 필요한 때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을 선택하였기에 위대한 나라로 건재할 수 있었다. 처칠보다 한해 늦게 태어난 한국의 위대한 인물 이승만이 있었고 당시 사상적으로 혼란할 때에 현명한 국민들이 반공정신이 뚜렸한 그를 선택하였기에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러한 역사적 정통성을 부인하고 김구의 민족주의를 선호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따르며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만세)을 외치던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섰으니 참으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평화를 말하여 대중과 영합하는 지도자들이 득실대는 이 때에 윈스턴 처칠과 같이 전쟁을 말하는 인물을 한국인들은 과연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 큰 내부적인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구나 == 국민들이 백성들이 어느 편에 서야 될지 참으로 = 이 쪽 말을 들으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쪽 말을 들으면 그것이 옳은 것 같고 ...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 참으로 지금 처해있는 = 정치 혼란과 이 나라에 모든 이 사건들은 잘못 = 흘러가고 = 있느니라. 물론 이북과 평화적으로 합의하는 것은, 잘 해결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지만 지금 참으로 현 대통령이 너무나 참으로 외국과의 미국과의 잘못하는 것은 큰 실수를 범하고, 젊은 시대들을 === 혼동시켜서 = 지나간 날에 받았던 과거를 망각하며 현재를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 한국에 아직은 너무나 빠른 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터인데, 물론 시간이 가고 날이 가고 오랜 세월이 가면 현대통령이 하는 것도 틀린 말을 아니지만, ...> (2003.6.15)

오는 전쟁 막을 수 없다
1930년대, 마귀 아돌프 히틀러는 하는 일마다 먹혀 들어갔다. 1936년 히틀러는 獨佛間 중립지 라인랜드를 다시 점령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가만히 지켜만 본다. 조용한 외교랍시고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먹어치운다. 제 나라 제가 먹어치우는데,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영국과 프랑스는 가만 있는다. 전쟁하잔 말이냐? 1938년 9월, 머저리 영국수상 네빌 챔벌레인이 뮤니히에 달려가서 히틀러에게 멀쩡한 남의 나라, 아니, 영국의 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랜드는 잡수셔도 괜찮다고 제 맘대로 바치고 돌아와서, 우리 당대에는 평화가 보장되었습니다! 영국민들에게 백지장을 내두른다. 평화요! 평화! 히틀러는 수데텐랜드가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 진군한다. 평화요! 평화!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폴랜드를 후려친다. 평화요! 평화! 이렇게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윈스턴 처칠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히틀러가 독일에서 개판치기 시작할 때부터 처칠이 부르짖었다. 히틀러는 악마다! 오는 전쟁 막을 수 없다.! 전쟁 해야 한다! 준비하자, 준비해! 군함 더 만들고, 비행기 더 만들자! 아무도 처칠 말을 듣지 않았다. 냉전 수구꼴통이 되게 시끄럽네. 세계대전 끝난 지가 엊그제인데 전쟁은 무슨 전쟁?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었다. 1940년 5월 13일, 영국왕으로부터 수상으로 임명 받으면서 윈스턴 처칠이 영국회의원들에게 한 유명한 연설이다: “새로 만든 내각에 동참하는 동료들에게는 이미 말했습니다만, 이제 의원 여러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제가 앞으로 여러분께 드릴 것은 오직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사상 유례없는 처절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없는 투쟁과 수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요? 말씀드리건데, 우리는 육지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을 다해서, 이제까지 인류 역사상 보도듣도 못했던 이 무시무시한 악마와 전쟁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정책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승리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 어떤 수난을 겪더라도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 전쟁이 아무리 길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죽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영제국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대영제국이 이제까지 추구하던 것들도 허사입니다. 이 시대의 명제였던,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던 욕구도 사라질 것입니다." "본인은 제게 주어진 과업을 가벼운 마음과 희망으로 맡겠습니다. 저는 세상사람들이 우리들의 대의에 따라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난국, 이 시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들 나를 따르시라!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김정일은 악마다! 김대중 노무현도 악마다! 오는 전쟁 막을 수 없다.! 전쟁 해야 한다! 준비하자, 준비해! 군함 더 만들고, 비행기 더 만들자! 대선이 아니라 전쟁이 오고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한반도의 남북전쟁이 오고있다.
2007년 3월 16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

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 11. 30 ~1965. 1. 24
영국의 정치가·저술가·웅변가.
1940~45년과 1951~55년 총리를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 위대한 국가지도자로 활약했다.
~ (중략)
처칠은 점차 독일의 위협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비록 처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그는 계속 재무장을 주창했으며, 특히 영국 공군은 독일 공군에 비해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를 침입했을 때, 처칠은 만약 영국이 이탈리아에 제재조치를 취한다면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접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제재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이 일단 행동을 취한 이상 최후까지 목적을 철저히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왕 에드워드 8세의 퇴위(1936. 12. 10)를 둘러싸고 논란이 발생했을 때, 볼드윈에 반대하여 국왕의 입장을 옹호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7년에 네빌 체임벌린이 볼드윈의 뒤를 이어 당권을 장악하자 처칠과 보수당 지도부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독일의 재무장과 팽창정책에 대해 처칠이 제공한 정보의 정확성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몇 번씩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고는 자주 무시되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켰을 때 처칠은 그것을 "전면적이며 완전한 패배"라고 비난했다.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여론은 처칠의 공직 복귀를 요구하며 들끓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날 체임벌린은 처칠을 해군장관에 임명했다. 소위 "겉치레만의 전쟁"에 대한 불안과 노르웨이에서 영국 파견군의 패배,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입 등으로 인해 체임벌린은 사임하게 되었다.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총리직에 오른 처칠은 참다운 거국 내각을 실현하기 위해 이전의 적대 관계를 뛰어넘어 노동당도 연립정부에 참여시켰다.

1940년 5월 13일 신임 총리로서 의회에서 행한 최초의 연설에서 그는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전원일치의 신임투표를 얻었다. 됭케르크 철수 후 영국이 침략을 받을 가능성을 경고함에 있어 그는 그 특유의 자신에 찬 불굴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대가가 어떤 것이든간에 우리들은 바다에서 싸울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들판과 시가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가 붕괴에 직면하자 처칠은 프랑스를 연합국측에 계속 남아 있게 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1940년 6월 16일 영국·프랑스 연합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만약 우리들이 싸움을 중단하면 그때,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고 애착을 품어왔던 일체의 것이 새로운 암흑시대의 심연 속으로 잠겨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를 수행할 결의를 굳게 다져야 한다. 만약 영국과 영국 연방이 1,000년 동안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이때야말로 그들의 가장 훌륭한 시기였다"라고 이야기하며 행동하지 않겠는가!"라며 다가올 "영국의 결전"을 격려했다.

독일 폭격기가 영국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고 있을 동안 처칠은 연설과 피폭지역의 시찰, 그리고 그의 특징이 된 "V" 사인으로 사기를 진작시켰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적인 서신을 교환하여 밀접한 협력관계를 강화했고, 1941년 8월에는 자유진영의 승리를 약속하는 대서양헌장이 작성된 회담을 포함하여 일련의 회의를 성사시켰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입하자 처칠은 1941년 6월 22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찍이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을 취소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 대해 가능한 한 지원을 할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뒤이어 처칠은 스탈린에게 최초의 사적인 서신을 보냈으나 스탈린 앞으로 보낸 편지에 관해서 후일 "……나는 많은 거절의 회답을 받았다. 다정한 말을 받아본 일은 좀처럼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대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1941. 12)은 전쟁의 국면을 일변시켰다. 처칠은 "나는 미국의 참전을 알았다. 그결과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라고 썼다. 그는 루스벨트와 교섭하여 자원을 공동비축하고, 태평양에서 지휘체제를 통하여 먼저 독일을 격퇴한 후에 연합국측의 전병력을 일본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극동과 중동에서의 군사적 불운에 대처하고 신속하게 유럽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자는 스탈린의 압력에 직면하여 그는 이 제안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그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전쟁 수행에 관한 전반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많은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흐름처럼 메모를 했다. 의회에서 처칠에 대한 신임은 확고부동했다.

바쁜 예정 속에서도 루스벨트와 스탈린과의 회담을 계획하고 있던 처칠은 1943년에 2번 폐렴으로 쓰러졌으나 1944년 1월 중순에 회복되었다. 5월에는 영국 해협의 순양함에서 연합군의 독일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 공격을 관전하겠다고 고집했으나 국왕 조지 6세가 직접 나서 간신히 그의 모험을 단념시킬 수 있었다.

군사적 성공과 동시에 정치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처칠은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권 분할에 합의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또한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의 무력개입을 승인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의 대부분은 극동에 대한 해결책의 모색을 포함하여 주로 루스벨트와 스탈린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처칠은 이에 간섭하지 않았다. 폴란드를 독립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그는 소련의 약속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약속은 곧 파기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미국에게 연합군을 가능한 한 깊숙이 또한 신속하게 동유럽으로 진격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충고는 무시되었으며, 후에 그가 " 철의 장막"이라고 부른 것이 유럽을 가로질러 소련군 점령지역 전역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마지막 주요회담에서 처칠은 최종적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1945년 7월의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국민은 전쟁 지도자로서 처칠에게는 환호를 보냈지만, 처칠의 보수적인 국내 정책보다는 노동당의 개혁정책을 선택했다. 1946년 3월 5일 야당이 된 보수당 지도자 처칠은 미국 미주리 주 풀턴에서 소련 정책의 위협에 대항하여 미국과 영국은 평화의 수호자로서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9월 19일에는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유럽의 통일을 위해 "유럽 위원회"의 결성을 촉구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가 인도와 미얀마에 독립을 부여한 사실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역사서인〈제2차 세계대전 The Second World War〉(6권, 1948~53)을 집필했다. 1950년 2월의 총선거에서도 보수당은 패배했으나, 1951년 10월에는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정권을 되찾았다. 다시 총리가 된 후 그의 주된 관심은 외교문제에 있었다. 1945년 이래의 "형제와 같은 결속"이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처칠의 워싱턴 방문으로 영국이 한국전쟁에서 철수하지 않을까 하는 미국측의 염려는 사라졌으며, 양국은 독일 재무장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조화시켜나갔다.
은퇴 후의 생활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53년의 대관식에 즈음하여 처칠에게 기사작위를 부여하고 가터 훈장을 수여했으며, 같은 해 그는 노벨 문학상도 수상했다. 1953년 5월 스탈린 사후 처칠은 서방측과 소련 지도자의 정상회담을 희망하여 이를 논의하기 위해 버뮤다 회담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회담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어 1954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11월 30일 그의 80회 생일에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초당파적인 축하의식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거행되었다. 그가 말년에 내린 중요한 정책결정으로는 냉전시대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정상회담의 개최에 노력을 기울인 것과, 영국이 "힘"을 바탕으로 교섭을 진행할 수 있도록 수소폭탄의 제조를 승인한 것을 들 수 있다. 1955년 4월 5일 노령과 건강의 쇠약 때문에 사임했는데 후임자 이든이 4개국 제네바 회담 계획을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2, 3주 후의 일이었다.

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도 처칠은 계속해서 하원에 의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고, 1955년 선거에서도 84세의 고령으로 당선되었다. 1956~58년에 또 하나의 주요저작인〈영어 사용 민족들의 역사 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4권)를 출판했다. 많은 명예가 주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존하는 최대의 영국인"으로 생각했다. 1963년 4월에는 미국 의회의 결의에 따라 명예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65년 1월 24일 런던에서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왕족 이외에는 금세기 최초로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조사를 보냈다. 그는 블렌엄 궁 가까이 있는 블래든의 교회 묘지에 양친과 나란히 묻혔다.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list/B20c2023a.html

<관련 미가608 메시지>
http://micah608.com/6-10-8-Kim-conspiracy.htm
http://micah608.com/6-2-22-conspiracy-unification.htm
http://micah608.com/3-6-15-pro-us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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