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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칼럼
이사야 칼럼 은혜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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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아마도 서양 속담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이 권고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자기를 포기(抛棄)하는 자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절망(絶望) 가운데 마음을 주관하여 재활의 의지를 주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끝까지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재활을 포기하는 경우, 자살하는 경우, 의욕과 희망을 포기하는 경우가 무수하게 많음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돕지 않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세 번째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신다. 자기를 도울 수 있는 분으로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헛되이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여기에 포함된다. 행위와 믿음이 상반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좌절(挫折)하여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는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 나를 살리소서’한다면 이율배반이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실제로 우리는 긍정적인 노력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반대의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허무한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정의를 위해 용기있는 행동을 하기는커녕 부정한 일에 간여하면서 ‘정의를 세우소서!’ 기도하지는 않는가? 미워하는 행위를 지속하면서 ‘사랑하게 하소서!’ 하지는 않는가? 부정한 돈을 요구하며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행위를 하면서 ‘개혁하게 하소서’ 하는 사람이 아닌가? ‘감당하라’고 맡겨주셨는데 끝까지 ‘나는 할 수 없어요’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2001.2.21에 받은 묵시이다.

<맡길 수 있고 할 수 있고 그 일을 해낼 수 있어 맡겨 주었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그 일을 맡겨 주심은 감사함으로 그 일을 감당하겠나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나이다’ 하며 ‘나는 힘들고 어려워서 이 일을 할 수 없는데 왜 나에게 맡겨 주십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참. 부족한 저에게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하는 자세로 일할 때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얼마나 일의 능률이 오르겠느냐? 한데 ‘어찌 부족한 종에게 이런 것을 맡겨 주십니까 저는 할 수 없어요’ 했을 때 할 수 없는 사람밖에 더 되겠느냐? 참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저희들에게 이름만을 맡긴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기에 그 일을 맡겨 주신 것은 우리 주님이 판단한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보시고 할 수 있기에 그 일을 맡겨 주신 것이지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어찌 그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그 일을 맡겼거늘 어찌하여 부족하여 맨날 부족하다고 하면 언제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기에 맡겨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할 것이거늘... ‘주님 기꺼이 감당하여 그 일을 꼭 해내겠습니다’하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노라.

항상 선생님에게 ‘나는 할 수 없어요 못한다’고 하면 얼마나 선생님께서도 너를 책망하실 터인데 하나님께 ‘할 수 없다’고 맨날 말하면 주님께서 ‘그래 너 할 수 없어? 그러면 내가 딴사람한테 옮겨 주지!’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선생님도 계속 그 일을 맡겨 주었는데 네가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 딴 학생한테 맡기듯이 하나님도 똑같다고 생각할 때 세상이치와 하나님의 이치가 똑같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 무엇이든지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할 때에 그 능력도 오르며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어떤 것도 우리 주님께서 힘을 주시면 그 일을 결심하며 고집하며 가는 것도 우리 인간에게 주신 능력(能力)이니라.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하나님의 능력과 세상의 능력이 겸비(兼備)하여 가는 것이지 ...아무리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어린이에게 이런 일을 맡겼겠느냐? 할 수 있기에 그런 일을 맡겨 주신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라. 다시금 우리 주님께서는 맨날 ‘나는 할 수 없어요 나는 부족하고 미련한 종입니다’ 하면 미련한 사람밖에 될 수 없으며 부족한 사람밖에 될 수 없으며 자신감(自信感)을 가지고 ‘나는 주님이 맡겨 주셨으니 끝까지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같이 미천하고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참 주님이 나를 이렇게 잘 보시고 나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맡겨 주셨으니 참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하면서 진정 그 일을 기쁘고 감사함으로 한번 더 맡겨달라고 하면 더욱 일의 능력도 오르며 더욱 감사함으로 일이 추진될 때 거기서 답도 나오느니라.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할 때 어찌 좋은 답이 나올 수 있으랴. 진정 감사하고 기쁘고 좋은 마음으로 할 때 거기에 좋은 답이 나오지 않겠느냐? >
-미가608 제2권 426쪽 중에서-

계속하여 ‘나는 할 수 없어요’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요 버림을 받는 행위다. 회사에서 직책을 거두는 징계조치가 직위해제(職位解除)이다. 맡겨준 직책을 계속하여 불평하며 소홀히 할 때에 그 직책을 거두어 가신다. 그것은 희망을 거두는 것이며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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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病) 중에서>

<그러므로 기독교안에서는 죽음까지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이른바 지상적이며 세속적인 고뇌, 즉 곤궁·질병·비참·가난·재난·고통·번민·비애·원한이라 불리워지는 모든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고통에 가득찬 것이며, 우리 인간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당자들이 "죽음보다 괴롭다"고 아우성칠 정도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설사 그것이 병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일지라도, 결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닌 것이다. 이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은 크게 2편으로 나누어 서술되고 있다.

제1편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는 제목 아래, "절망"을 분석한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한다.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이요,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이며, 거기에는 세 개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 (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다. 여기서 "자기"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꾸어 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라고, 다음에 그는,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또 절망의 보편성을 논하고, 마지막으로 절망의 형태들을 고찰한다.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이다"라고 하고, 죄의 정의와 죄의 계속에 대하여 논한다. 죄의 정의에서는 특히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 즉 "죄는 무지이다"가 주목된다. 죄의 계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그리고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설명하는 죄. 키에르케고르는,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인간의 자기 소외의 과정을 이 책에서는 절망으로서 깊은 분석의 메스를 가하고, 이 절망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즉 인간의 자기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신(神)을 믿고, 인간 각자가 신 앞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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