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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칼럼
이사야 칼럼 은혜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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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겸양(謙讓) 즉 겸손과 양보를 가장 큰 덕목의 하나로 인정하고 칭송한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의 자세와 예의는 어려운 관계일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겸손의 미덕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겸양과 비굴의 차이를 있음을 알아야 온전한 겸손과 양보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겸양은 좋은 것이지만 비굴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겸양이라는 이름으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몇 가지 주제를 생각해 본다.

첫째로 자기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리와 자유를 양보해서는 안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스스로 노예로 살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 자유는 무가치하다. 1517년에 촉발된 루터 종교개혁의 가장 중심되는 내용은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사상이며, 이 진리를 성취하기까지는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어 만인에게 복음으로 전해졌지만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의미없는 단어에 불과하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기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사제에게 속절없이 양보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사제들이 복과 저주를 주는 주체이며 신도들은 그에 소속된 양으로 취급하는 사상을 선택하여 거기에 안주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에게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아직도 이단으로 취급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어 겸양해야 하지만 사제에게 복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하여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

둘째로 진리를 양보하는 행위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일탈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기본 교의(敎義)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신앙을 유지한다 하면서 기독교 근간을 부정(否定)하고 부인(否認)하는 자유를 누려서는 안된다. 기독교 교의까지도 마치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하며 자기가 그것을 주관하는 자처럼 양보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우리가 타종교를 용인하는 것은 주님이 현실적으로 그들의 생존과 행복을 용인하시기 때문이지 타종교가 진리이기 때문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이며 사람이 존폐를 좌우할 수 있는 인본주의 사상의 산물이 아니다. 예를 들면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지도자의 발언은 임의적인 것이며 성경의 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개인의 자격이나 타종교인의 입장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는 내용이며 그렇게 주장할 것이나 기독교를 대표하는 책임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한 내용이며 양보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망발이라 할 것이다.

셋째로 자기를 희생하여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공익을 양보하는 것은 비굴한 것이며 정의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책임자가 집단의 폭력 앞에 양보하여 공익의 몫을 이익집단에게 돌리는 것은 비굴한 것이지 양보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역감정에 편승한 이익집단의 폭력적 요구에 무기력하게 양보하는 책임자들을 보며 좌절한다. 특권을 이용한 부정사례는 무수히 많겠지만 최근에 연일 구속되는 국회의원들의 혐의의 대부분은 개인이나 회사에게 성실한 책무이행을 양보한 대가로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이라 여겨진다.

넷째로 우리사회는 어른들이 전승해야할 교훈을 자녀들에게 과도한 양보를 한 것 같다. 엄격한 가부장제 유교사회에서 부모효도를 강요받았던 문화가 붕괴되면서 부모를 등한히 여기고 어린이들이 우상이 되어 어른들이 가진 교훈을 양보한 결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조선일보에 보도된(04-01-11) 리서치&리서치사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에 대한 응답결과는 50대 이상은 52%가 북한을 지목한데 반하여 20대는 58%가 미국을 지목하였다 한다. 이러한 한국인의 의식변화의 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처럼 부모와 자녀가 전혀 상반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처럼 나라 없이 떠돌면서도 수천년 동안 전통을 간직해 오지는 못할망정, 겨우 한 세대를 부모가 겪었던 공산주의 고통의 경험을 자녀들에게 바로 전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혹자는 민족문제와 관련지어 용서하며 관용하자는 주장을 펴지만 그것은 민족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민족도 올바른 가치에서 세워지지 않으면 북한처럼 사탄의 왕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이 통일이 지상최고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스스로 지켜낼 의지가 없는 가치를 다른 사람이 지켜주지 않는다. 이제와서 후회하며 뒤늦게 자녀들에게 설득해 보려 하겠지만 한번 정착된 관계가 단기적인 노력으로 복원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모의 즉흥적인 감정의 발로는 전혀 다른 ‘자녀학대’의 모양으로 나타나 가치관의 혼돈과 갈등이 반복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인의 존엄성, 기독교진리의 불변성, 질서와 공의의 확립, 자유민주주의 체제 등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인격을 낮추어 양보하고 우리의 이익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누구나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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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잠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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