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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출애급을 알려면 지도자 모세를 알면 되듯이 한국의 현대사를 바르게 알려면 지도자 이승만을 알면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에 출생하여 1965년에 서거하셨으니, 조선왕조, 대한제국, 일본제국, 임시정부(대통령), 미군정, 대한민국(대통령) 여섯 개의 다른 국가 체제의 중심에 있었던 특별하고도 위대한 인물이었다. 조선을 두고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 되자 이에 대응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 내부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하였다. 격랑에 요동하는 대한제국이 출항할 즈음에 24세의 청년 이승만은 개혁세력을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에서 시위 활동하다가 체포, 황제위해죄로 투옥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감형되어 6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신체는 부자유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마음으로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이후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 지도자로서 독립을 위해 세계를 방랑할 때에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며 건국할 때에도 6.25 동란을 승리로 이끌기까지 ...  수많은 난관을 극복할 힘을 얻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원순 선생이 저술한 "인간 이승만" 책에 기록된 위대한 선각자의 개종과 신앙에 관한 내용이다.

대한제국 [大韓帝國]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용어를 공식적인 칭호에서 군주(君主)를 대군주(大君主)로, 전하를 폐하(陛下)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勅),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朕)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함으로써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고 같은 해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9월에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웠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을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政體) 문제로 대립하였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대립은 1898년 절영도(絶影島: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租借)하는 문제로 격돌하였다. 조차가 외국의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절영도 조차 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적인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고종은 경무청(警務廳)과 친위대(親衛隊)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趙秉式)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함으로써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싸움은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수구파 내각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호는 대한제국이고 정체는 전제군주제이다. 수구파 정부는 국제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실력을 기르는 데 힘쓰기보다는 친러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이를 지켜본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안 정부도 1904년 1월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을 점령하고 2월 23일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해되기 시작, 일본은 7월 20일에는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았으며,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같은 해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호는 다시 조선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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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신앙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마음의 해방이 생겼다. 그것은 기독교로 개종한 일이었다. 이것은 장로교 목사 제임스 S. 게일의 조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기가 개종하기까지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장 기묘하게 생각되는 것은 19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내 영혼을 구해준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자문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 이야기를 해주던 이상한 사람들이 이처럼 바보 같은 교리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확실히 그들은 이 무지한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따라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만이 교회에 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위대한 불교의 지식이나 유교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교양 있는 학자는 결코 이와 같은 교리에 미혹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자 나는 아무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배재학당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서 말했다. "아가(어머니는 내가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도 아가라고 부르면서 사랑해 주셨다.)야, 너도 천주광이 되려고 하는구나." "아닙니다. 어머님, 그들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믿어 버릴 만큼 나는 바보천치가 아닙니다. 이 종교의 신자가 된 학자는 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이것을 듣고 어머니는 얼마간 안심을 했으나 어머니의 마음에서 불안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곧 아들이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아 급격하게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은 통치자의 폭정에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안 젊은 양반의 마음속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그 당시 국민들이 얼마만큼이나 정치적인 압박을 받았는가를 아는 사람이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나 자신에게 말했다. 만약 이와 같은 정치의 원칙을 우리 동포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동포들에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치적 변동은 스스로 오는 것이 아니고 법과 규칙의 문제만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국민이나 지배계급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속성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새벽 예배에 이따금 참석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구원 이상의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동포애와 봉사의 복음을 나에게 베풀어 주었다. 나는 이 외국 종교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공자와 동일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가슴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 이야기는 그가 투옥되기 전까지의 정치운동을 하던 시기에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그의 감정을 극히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이야기이다.

당시는 그가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미숙했기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는 무엇에 대해서 반응할 것인가의 감정이 강했다. 그는 낡아빠진 전제정치는 타도되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전제정치에 대신하는 새로운 것을 만들 책임이 부여되었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괴로운 감옥생활은 그를 갑작스럽게 성장시켰다. 즉 정치와 인생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신에 대한 신앙과 동지에 대한 신뢰를 얻게 된 것은 감옥 속에서였다. 토마스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와 종교는 불가분의 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그가 미국 잡지에서 읽었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논문도 기독교의 신앙에 비추어 해석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의무도 없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신앙이 없이는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라는 교리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신앙을 가진 진실한 신자는 자신의 동포들이 비참한 판국에 처해져 부정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깊은 논리로써 자신의 마음을 엄하게 훈련시켰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단순히 그 원리에 지적으로 동의했다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에게 생생한 영감(靈感)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동정이 그의 영혼에 스며들어 자신이 신의 보호 아래 있고, 그의 생애는 파란 많은 것이나 신의 섭리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깨달았다. 그는 무엇이든 그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배웠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더욱 열렬하게 생각하였다. 이 수용의 겸손은 그의 성격의 일부분으로 형성되었다. 그가 자신은 언제나 신의 뜻에 따라서 기쁘게 사용되도록 준비된 도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당시의 일이었다. 그는 절망(絶望)과 용기(勇氣)를 동시에 느꼈다. 절망은 그 자신의 운명을 이끌지 못했고 또한 평안을 구할 수 없었으나, 신의 위대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봉사하려는 용기는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 감정은 그의 마음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사람됨을 객관적으로 보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는 그 단점과 부딪쳐서 그것을 개량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어떠한 책임이 그에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수행해 내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이 개종이 옥중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에게 직접적이며 실제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감방 안에는 그 외에도 온갖 비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모두 저질러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른 사람도 있었다. 또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부패한 정부를 개선하려다가 투옥된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양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성서의 구절을 큰 소리로 읽었다. 감금된 사람들은 지루한 시간의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상관할 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낭독에 즐겨 귀를 기울였다. 기도가 영교의 자연스러운 수단이 되고 하루의 시종이 된 이승만의 후년의 습관은 이때에 이룩된 것이었다. 이 영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는 고통스러웠던 망명생활 때부터 절망적인 정치운동의 시대, 대통령이라는 중책을 짊어진 집권시대, 4.19로 인해 하와이로 망명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 괴로울 때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중 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고뇌가 십자가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계속)
-이원순 저 "인간 이승만" 70-72쪽에서

2002.1.22 9:30
* 전날 소제목을 인쇄하여 성령께서 첨삭(添削)할 내용을 골라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을 때 ‘역대 대통령들의 행적을 정확히 역사해 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기록하라’ 하신 약속대로 금일 역사해 주시다
<역대 대통령들의 행적을 보여주노니 정확히 기록하라!>
할렐루야! 오늘까지 우리 주님께서... 지금까지 이 나라에 되어진 대통령들의 업적을 또 하신 일들을 다시 한번 강권으로 역사하나니
-믿음의 기초를 다진 이승만 대통령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 믿음이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으로 허락하시고 오늘의 이 나라를 복음의 나라로 믿음의 나라로 우리 주님께서 세워주신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지만 오늘에 와서 이 나라의 모습들이 어찌된 모습일까요? 그 미국 영부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복음화 시키니 오늘에 이렇게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주었지만 오늘의 이 모습이 어찌된 모습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최고의 책임자들이 되기를 원하노라!
-미가608 제4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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