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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승만 대통령 131회 생신을 맞으며)
건국대통령 李承晩 박사를 생각한다 
  
  유럽에 가면 거대한 성당건물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이것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빌어 지은 걸작이다. 성베드로 성당, 톨레도 성당, 노테르담 성당, 쾰른 성당, 바르셀로나의 미완성인 聖가족성당(가우디 설계), 스트라스부르흐 성당 등은 최단 200년, 최장 800년이 걸려 지은 성당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성당에는 여러 건축양식이 다 들어 있다. 고딕,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바로크 등등 여러 양식의 부분 부분들이 하나의 종합된 예술품으로 서 있으니 더 감동적인 것이다. 역사의 기복과 문화의 나이테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오랜 성당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골동품이나 구경거리로 거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예배당으로 쓰인다. 유럽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그 역사를 호흡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민주주의를 그러한 성당건물에 비교해본다.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그런 성당을 짓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더 많은 세월과 더 많은 시행착오와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 시대까지 거슬러오른다면 오늘의 서구식 민주주의 역사는 약2500년이나 된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까지 올라가도 약800년이다. 이 오랜 기간에 민주주의는 갈之를 그리면서 서서히 발전해왔다. 
  
  민주주의는 특권층의 것으로 출발했다. 귀족과 시민만이 누리던 민주주의가 평민과 여성, 그리고 흑인 등 소수민족에까지 확산된 것은 최근 100년 사이이다. 유럽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이 확립된 것도 최근이다. 영국의 경우는 17세기말 명예혁명 이후이고 프랑스는 1871년 제3 공화국 이후이며, 독일은 1945년 이후이고, 前 동구공산권 나라들은 1989년 이후이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시간을 더 많이 먹고 자란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1948년8월15일 건국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는 국가라는 그릇이 없으면 담길 수 없는 보물이다. 국가 없는 민주주의란 종이위에 쓰여진 학설일 뿐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끌어내어 대한민국을 세우고 반역공산집단의 기습으로부터 이 신생아 같은 어린 나라를 구했다. 건국과 호국을 주도한 李承晩 대통령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첫장을 연 분이다. 우리가 그를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를 때 그 의미는 국민국가를 세운 분, 즉 민주주의 건설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국민이 자유민주주의의 기치 아래서 정권을 선택하고 국회의원을 뽑는 국민국가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그 뒤 수많은 기복이 있었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이란 운전대를 놓지 않고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같은 시기 북한의 金日成은 소련이 써주는 시나리오대로 반역집단을 세워 남쪽의 정통국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전통이 전무한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 그것도 생존의 위협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키워내야 하는, 아니 살려내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李承晩, 이 분의 어느 시기 행태를 과장하여 그를 독재자로 모는 것만큼 가혹하고 배은망덕한 일은 없을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을 독재자로 모는 이들의 논리적 근거는 그가 서구식의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聖베드로 성당을 왜 10년만에 다 짓지 않고 수백년이 걸렸느냐고 욕하는 것과 같은 망발이다. 聖베드로 사원의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맡은 건축가에게 왜 건물을 다 짓고 돔까지 올리지 않았느냐고 채찍질을 한다면 이는 이 건축가가 하나님이 못되었다고 욕하는 격이다. 李承晩 대통령이 하나님이 되지 못했다고 욕하는 자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참칭한 金日成에 대해선 욕 한 마디 하지 않는다. 
  
  李承晩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분이 민주주의 건설에 악영향을 끼친 부분은 공에 비교하면 작다. 민주주의 건설은, 대성당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李대통령은 그 기초공사를 한 분이다. 
  그는 우선 자유진영 편에 이 나라를 줄세웠다. 李박사와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 1990년대엔 북한처럼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자유진영은 선진국이다. 후진국이었던 한국은 선진국으로부터 민주주의 하는 방법과 시장경제 하는 방법과 군대를 운영하는 방법과 과학기술을 배웠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무능한 나라의 정권들과 친구가 되어 거짓말하고 학살하며 독재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이 남북한의 오늘날 차이를 불렀다. 
  
  후진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우선 농사짓지 않는 특권계급으로서의 地主를 없애는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하면 地主는 수구기득권세력이 되고 농민들은 불만세력이 된다. 여기에 공산주의나 이슬람 원리주의가 파고들어가면 항구적인 체제갈등이 생긴다. 南美의 대부분, 필리핀, 그리고 파키스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지주출신 정치세력의 반발을 꺾고서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만약 6.25 남침 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군이 지주로부터 농토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나눠주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 이들은 농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북한군 편에 서서 국군에 대항해 싸웠을 것이다. 농지개혁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을 뿐 아니라 민주한국을 지켜냈다. 
  
  李承晩 대통령은 6.25 휴전과정에서 미국을 협박하다시피해가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이에 근거한 한미군사동맹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준 울타리요 우산 역할을 하고 있다. 韓美동맹은 또 미국이 깔아놓은 세계의 무대에 한국인이 등장하여 수출도 하고 투자도 하며 이민도 갈 수 있는 활동공간을 제공했다. 한국인은 자유진영의 지도국인 미국의 血盟이란 보증하에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안보가 불안하면 절대로 필 수 없는 꽃이다. 한미동맹을 만든 李대통령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그 울타리와 우산을 만든 것이다. 이런 분을 독재자라고 부르고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려는 戰犯세력을 평화, 민족세력이라고 부르는 작금의 한국내 좌파세력이야말로 민주주의 파괴세력이다. 
  
  민주주의는 교육받고 먹고 살 재산이 있는 중산층이 적어도 국민의 반 이상이 될 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李대통령은 전쟁중에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았고 대학생에게는 현역복무를 면제해주면서까지 人材육성에 주력했다. 더구나 그가 가르친 것은 독재에 순응하라는 가짜 주체사상이 아니라 독재에 항거하라는 민주주의 윤리였다. 이 교육을 李정권 때 받았던 학생들이 1960년 4.19 학생의거의 주력이 되었다. 이 세상에 자신을 타도하라고 가르치는 독재자도 있는가. 
  더구나 李대통령은 학생들이 시위진압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물러났다. 4.19 때 학생들은 선거를 다시 하자고 했지 "이승만 물러나라"는 구호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퇴진요구도 없는데 스스로 평화적으로 물러난 사람은 독재자가 아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발췌개헌, 3선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집권 시절 경찰과 특무대가 야당을 탄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李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파괴, 봉쇄하려 하지는 않았다. 6.25 남침을 당해서 전쟁중인 나라에서도 국회는 활동했고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언론은 군대와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선거도 중단되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좌익들까지 지도자로 모시려고 했던 위대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초대내각에서 친일파를 한 명도 쓰지 않았다(반면 김일성은 자신의 편에 선 친일파를 비호했다. 그의 동생 金英柱는 日軍의 통역을 한 사람인데도 제2인자가 되었다). 李대통령이 일제 때의 경찰관과 공무원들을 중용한 것은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일제 때 국가운영에 참여하여 배운 기술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쓰도록 했던 것이다. 일제 경찰관 출신들이 李정권의 수사기관에 들어가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고문수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수사관들의 과잉충성과 법치무시 체질 때문이지 李박사에게 모든 책임을 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관리가 백성들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던 조선조 관료의 체질과 일제의 탄압체질을 지도자 한 사람의 책임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순진하고 낭만적으로 보는 분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李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간판을 걸고 북한과 생존투쟁을 하면서도 그 원칙을 고수해가려고 苦鬪한 데 우선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부분이 90%라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부분은 10%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80%의 긍정이 남지 않은가. 그런 분을 독재자라고 불러 그분의 모든 업적을 말 한 마디로 무효화시키려 드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 전체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건국, 호국의 시대가 독재자의 시대였단 말인가. 그 시대의 국민들은 독재자에게 모두 굴종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망할 지경에 처했던 나라를 국민들이 다 잘해서 이렇게 발전시켰단 말인가. 李대통령 시대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그 뒤 朴대통령이 성공적으로 나라를 근대화시킬 수 있는 울타리와 바탕과 우산을 마련했던 고난의 시절이자 영광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功過는 대통령과 국민들이 나눠가져야 한다. 功의 가장 큰 부분과 過의 가장 큰 부분은 물론 李박사의 몫이다.  

-조갑제 06-03-25

*   *   *

"이승만이 오늘의 미국 대통령이라면" 
이인수 박사가 전하는 "아버님" 이야기 
 
주말인 25일 오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 네티즌들이 ´이화장´에서 만났다. 

네티즌 모임인 <우남 이승만과 건국사 바로 알리기 운동>이 "건국이념을 알면 지금과 같은 이념혼란을 없을 것"이라며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바로 보자"는 취지로 마련한 이날 간담회에는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는 네티즌들을 비롯, 애국국민운동대연합·자유넷 등 자유진영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승만 박사가 1947년부터 경무대로 이사 할 때까지 거주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이화장´에는 현재 이인수 박사 내외분이 살고 있다. 

이 박사는 네티즌들의 방문을 매우 반기는 모습이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며 "오늘은 이화장의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가 얘기하는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건국의 아버지"였다. "미·소 공동위원회를 물리치고 민족의 선거를 통해 우리 정부를 세우는 것"은 이승만이란 인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광복을 맞은 것은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 15일"이라고도 했다. 45년의 8월 15일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일 뿐, 건국 이전까지는 신탁통치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식 "외교"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사 정도 되는 분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면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얄타회담을 통해 소련을 태평양전쟁에 끌어들인 미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에 대해서는 "멍청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소련의 발언권이 커졌고, 남북이 분단되었으며, 이후 미국 역시 공산주의와의 전쟁으로 피를 흘려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같은 미국의 "친소외교"에 대해 이승만은 "한국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 내전이 생길 것"이며 "그로 인해 미군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다. 

이 박사는 이승만의 이같은 ´선견지명´을 이야기 하며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이승만과 같았다면..."이라고도 했다. 

해방 직후 北에서 이승만 박사를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모시려 했으나, 이 박사가 거절했다고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美군정의 "여당"이나 마찬가지였던 "한민당"에서도 그를 모시려 했으나, 이 역시 거절했다고 했다. 

이처럼 거절을 한 이유는, 많은 정당이 난립해 민족이 분열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도 그 때 나왔다고 한다. 

당시 공산당이 이 박사를 반대했던 배경에는, 이 박사의 "남북왕래" 주장이 있다고 했다. "폐쇄사회"일 경우에만 공산 정권이 수립될 수 있는데, 이 박사의 주장대로 남북간에 3·8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경우 폐쇄사회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에서 이 박사를 공격하기 위해 "친일파"라는 무기를 들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박사의 말을 "친일파와도 뭉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공격 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공산당 총수였던 박헌영은 이승만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는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감히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고 한다. "친일파 처벌"을 말하는 박헌영에게 이승만은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나라부터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고, 이에 박헌영은 "맞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공산당은 "누가 친일파인가" 대신 "누가 친일파가 아닌가"라는 작전을 썼다. "공산당은 친일파가 아니며, 공산당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사람들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논리로 나왔다. 이에 친일파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도 상당했다고 했다. 

이 박사는 이와함께 해방 직후에는 진짜 친일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며 ´친일청산´의 허구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완용이나 송병준처럼 나라를 넘겨준 친일파는 이미 죽었고, 민족을 괴롭히던 악질 친일파는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친일파는 스스로 "친일은 했어도 크게 죄지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설명이다. 

이 밖에도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승만이 말한 것은 "우리 국민을 대변할 수 있는 정부"였으나, "북에서는 그런 정부를 세울 수 없으니, 남한에서만이라도 세우자"는 것이었다고 이 박사는 전했다.

[김남균 기자]hile3@hanmail.net 독립신문 06-03-25

<관련 미가608 메시지>

2002.1.22 9:30 
할렐루야! 오늘까지 우리 주님께서... 지금까지 이 나라에 되어진 대통령들의 업적을 또 하신 일들을 다시 한번 강권으로 역사하나니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 믿음이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으로 허락하시고 오늘의 이 나라를 복음의 나라로 믿음의 나라로 우리 주님께서 세워주신 대한민국이건만 오늘에 와서 이 나라의 모습들이 어찌된 모습일까요? 그 미국 영부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복음화 시키니 오늘에 이렇게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주었건만 오늘의 이 모습이 어찌된 모습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최고의 책임자들이 되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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