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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인자중(隱忍自重) 조부님의 우국충정 
1951년경일 것이다. 휴전 진행 당시 미군 B-29가 회문산을 폭격할 때 천둥치듯  하루 종일 ‘윙-윙’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지금도 꿈에서나 주변에서 ‘웅 웅-“하는 소리가 오래 울리면 나도 모르게 두렵고 불안해진다. 일종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구호품으로 들어온 설탕 분유 옷가지 신발을 배급받았던 기억이 미국에 감사한 마음을 주었다. 잠자리 비행기(헬리콥터)가 조부님 거처하시던 동네 인근 우리 밭에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누님의 손을 잡고 숨차게 달려 갔었다. 하늘을 날으는 신비한 기계문명이 전쟁과 함께 다가온 시기였다. 
전투기 굉음을 들으신 조부님께서는 이렇게 시로 읋으셨다. (강재 시문선에서)
<밤에 자는데 비행기 소리 
우뢰가 지나간듯 하늘을 울리고 
마음 아픈 오늘일 
온 나라 하늘에 울리네> 
또 자녀를 군대에 보내는 날에 이런 시를 남기셨다. 
< 지금 전쟁터에 보내려니 
뚝뚝 눈물 흘리며 저 하늘을 우러러 보네 
하늘에 뉘우치오니 사해에 전쟁을 끊어 주소서!>  
가슴 아프게 했던 그 아들은 지리산 빨치산토벌대에 참가하였고 지금은 대전 현충원에 잠들어 계시다. 
(대전 현충원 509 묘역 1410 이강유)

- 빨치산 준동지역 가문의 수난
조부님 3남 부친께서는 6.25 당시 청웅면 서기로 애국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하셨다. 면서기와 경찰 가족은 빨치산들의 표적이 되어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빨치산 출신 이태가 쓴 ‘남부군’ 책을 보면 북에 회귀하지 못하고 지리산 줄기 회문산에 웅거하던 빨치산들이 1951년 어둠을 틈타 백년산 우리 집 앞산 고양이능선을 타고 내려와 경찰서를 습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필자는 3살 유아로 곤히 잠든 시간이었으리라. 
낮에는 평온한 듯하였으나 밤에는 빨치산의 세상이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방문을 잠그고 창호지에 비치는 불빛을 막기 위해 초석을 두르고 방문을 다듬이돌로 막고 다듬이 방망이를 무기 삼아 가까이 놓아두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밤 뒷문에서 “꽈-앙”하는 폭음과 함께 문이 무너져 내리고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황급히 집을 뛰쳐나가셨던 아버님은 오리길 경찰 지서로 달려가 신고하고 보니 얼음가시에 찔린 맨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하루는 부친께서 빨치산들에 납치되어 모진 매를 맞고 끌려가다가 야간 이동 중 대열을 빠져나와 언덕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하여 구사일생 하셨다. 그때 구타당한 후유증으로 후일에 골반을 대수술을 하여 큰 고통을 겪으셨다. 
가문의 가장 비극적 사건은 기르시던 소와 함께 빨치산들에게 끌려나가신 종조부님께서 옥전리 계곡에서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져 오랜 세월 모두에게 비통한 상처를 낸 것이다. 그 아픔을 이기고 상경하여 큰 기업을 이루신 분이 강진 당숙님이시다. 
그악한 전쟁과 고달픈 일상 가운데서도 백부님 일찍 여의시고 4남2녀 건사하며 문중 대소사를 묵묵히 감내하셨던 분은 큰집 백모님이셨고 외손들까지 가문을 빛낸 동량들이 많이 등장한 것은 그분들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차남 석재종형댁은 시골에서 상경한 필자 포함 여러 자녀들이 성장핳 수 있도록 가문의 학숙과 같은 역할을 해주셨다. 

- 대담하셨던 모친
한현자 모친께서는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청주한씨 집안에서 장녀로 태어나 18세에 시집을 오셔서 양반가문의 엄격한 전통을 잘 인내하셨다. 
누님과 필자 그리고 다섯 여동생들을 억척스럽게 훈육하시어 우리 대부분 교사로 봉직하였다. 부모님은 “우리가 고생이 되더라도 어찌하든 자녀들을 잘 키웁시다” 다짐하셨다 한다. 
빨치산들의 살해 위협에 임실 신안 당고모 댁으로 피난을 가는 길에 모친은 6세 누님을 걷게하고 3세 필자를 등에 업고 동생을 임신한 상태에서 모래재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에 인민군 편에 가담했던 동네 빨갱이들이 다가오더니 "엇! 청웅면 서기질하는 강훈이 마누라다!" 하며 해치려는 찰나에 모친은 두려워하지 않고 누님의 손을 놓더니 갑자기 배를 걷어 올리며 "여기 배속에 있는 아이까지 모두 쏘아 죽여라! 너희가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 정녕 천벌을 받을 것이냐?" 하며 악을 쓰자 그자들은 마음에 찔렸는지 슬금슬금 가버렸다고 한다. (후일에 누님이 기억하고 들려주었다). 당시 모친의 약관 27세에 어떻게 악인들의 간담을 서늘케하는 용기와 기지가 있었는지 새삼 모친이 사무치게 그립다.

- 자긍심을 심어준 한마디 말씀들
보통 시골 어린이처럼 봄에는 나물캐기 여름에는 물놀이 가을에는 머루 다래 산과일 따기 겨울에는 썰매타기 연날리기 놀이에 바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어느날 동네아이들과 놀이하던 나를 보시고 유식하고 개방적이셨던 장성할머니(재당조모)께서 “얘야 너는 저기 재들하고는 달라! 네 아버지가 너만 공부 잘하면 유학까지도 보내 준다더라! 너 그거 아니?” 하시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로부터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모친은 책상 앞에 앉아있는 아들이 대견하셨는지 누룽지 과일 밤참을 준비해 주셨다. 목표에 꿈을 가지고 공부하는 학생은 우여곡절은 있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중학생 때에 기억나는 것은 김동문 국어선생님이 하루는 시골 자운영 밭으로 전교생들을 인도하더니 주변에 둘러앉아 시를 쓰라는 것이었다. 시를 쓰는 요령도 배운 바가 없는 학생들에게 무작정 써서 제출하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발표하는데 내 이름이 부장원으로 올라 있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자운영 꽃같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살고프다’는 글을 썼던 것 같다. 
하루는 윗동네 평사리 아저씨(재당백부)가 나를 가리키며 부친과 무슨 말씀을 나누고 가신 다음, "아부지! 무슨 내용이세요?" 하고 묻자 "네가 사주 팔자가 줗아서 어떤 인물이 된다는구나" 하셨다. 그 당시에는 '인물'의 의미도 모르고 지나갔으나 후일에 어떤 역사적 소명감같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자율을 존중하신 부친께서는 서울에 유학하던 여린 아들에게 "서두르지 말라!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격려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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